내가 처음 나만의 기록매체에 대해 집착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인 1989년이다.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다이어리"가 흔치 않았던 시절이다. 반면에 "바른손"과 "아트박스"등의 팬시문구류가 시장을 점유하며 급신장을 하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4년째 "프랭클린 플래너"를 다이어리로 쓰고 있다. 어차피 다이어리인 주제에 플래너라는 거창한 이름을 고집하고 내가 독일에서 쓰던 다이어리와 비슷한, 혹은 더 비싼 고가를 자랑하는 놈인데 그래도 꽤 마음에 들어서 자주 기록매체를 교체하는 나로서는 이례적으로 오랫동안 쓰는 놈이다.

사실 나는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과 같은 지극히 양키스러운 사고방식을 대단히 혐오하는 사람이다. 말로만 주절주절 떠들고 인생에 있어서 성공을 대단히 간단하게 정의내려 버리는 그 양키스러운 오만함에는 치를 떠는 인간이 바로 늑호란 놈이다. 나에게 있어서 인생이란,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성공이란 그 따위로 주절거릴 수 있을 정도로 하찮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값비싼 다이어리를 지금까지 쓰는 이유는 1989년부터 착실하게 쌓아온 다이어리에 대한 나의 노하우를 적용하기 대단히 편리한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플랭클린 플래너는 포멧 자체가 워낙 빡빡하고 뭔가 고압적이고 청교도적인 오러가 지끈거릴 정도로 노골적이다. 하지만 나는 스티븐 코비라는 인간이 주절거리는 리더쉽이니 성공하는 비결 따위는 깨끗하게 무시하고 내 기준으로 이 놈을 길들여 사용하고 있다.

그럴거라면 그냥 적당한 가격의 국산 다이어리를 써도 충분하지 않냐고 반문할 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이 플래너는 뭔가를 체계적으로 DB화 시키고 지속적으로 관리하기에 대단히 적합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이면에 깔린 양키스러운 오만함을 인내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줄곧 아날로그를 고집함에도 불구하고 디지털적인 타협을 필요로 하는 현재의 나로서는 결국 이것이 최적의 솔류션이란 결론을 내렸다.




[내 플랭클린 플래너의 모습 ^^;]

이게 내 플래너의 모습인데 보다시피 대단히 두껍다. 회사의 작업일정과 회의기록, 기획서 초안을 기록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초적인 기획서용 자료 따위도 축소복사 해서 잔뜩 때려넣은 결과다.

덤으로 사진을 봐서 알겠지만 여친인 쭈양의 사진을 비롯해 내 사생활도 전부 여기에 넣어두고 있고, 소설을 쓰기 위한 자료들도 역시 이 플래너 안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다. 물론 사생활에 관련된 것들은 전부 고등학교 시절부터 정립한 암호로 기록하기 때문에 누가 봐도 큰 문제는 없다.

만약에 "JZ app MT - KN14 / D&LM - bis na" 란 메모를 당신이 해독할 수 있다면 물론 나로서는 대단히 곤란해 진다. OTL

참고로 저걸 평문으로 변환하면 대단히 긴 하루 일정이 된다. -_-a

어쨋거나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이 이 한 권의 다이어리에 모두 집중되어 있다. 업무와 사생활, 일기, 아이디어, 생각과 미래에 대한 내 의지 따위도 모두 이 곳에 담겨 있다.

이렇게 시건방진 소리를 해서 미안한데 저 플래너의 미련스러운 두께는 바로 내가 지켜가고 있는 내 삶의 무게라고 믿는다.(늑호가 오만하고 아집에 가득찬 인간이라는 사실은 어제 오늘이 아니니 참고 넘어가 주시길...)

아무리 그런 나라고 해도 내가 쓰는 소설 - 그것도 하나의 제국을 무대로 장장 몇 세기에 걸쳐 겹치고 스쳐가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쓰고자 하는 나로서는 소설에 관련된 모든 내용을 이 플랭클린 플래너 안에 끼워 넣기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내리고 말았다.

결국 대안을 필요로 하는데 지금까지의 내 경험을 비추어 본다면 기록매체의 가격과 보존성은 정비례했다. 즉, 싸구려 노트에 쓴 것들은 모두 없어져 버린다. 그 내용물이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고 해도 몇 천원짜리 노트에 기록한 것들은 잠깐 방심하면 바로 실종된다.

내가 처음 출판한 소설인 "여왕의 창기병"의 후속편을 쓰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부끄럽지만 이 소설을 위해 작성했던 설정노트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난 자격미달인겨......OTL

그래서 고심 끝에 선택한 것이 바로 저 유명한 몰스킨 노트이다. 몰스킨 노트의 유래나 역사, 그리고 영화속에서 등장한 모습도 물론 매력적이지만 이런 것은 둘째 문제이고 몰스킨 특유의 시대착오적인 고집스러움이 나를 끌어 당겼다.

그리고 그 몰스킨 노트를 사용하는 다른 사람들의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감성(얼마나 멋지게 쓰는지 이 링크를 꼭 한 번 방문해 보길)이 나로 하여금 이 노트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나는 본래 물건을 대단히 험하게, 그리고 극단적으로 도구 그 자체로 쓰기 때문에 합성피혁(일명 레자) 따위의 다이어리는 반년만 지나면 저절로 해체되어 분해된다. 노트라면 말할 것도 없다. 일단 스프링 노트는 왼쪽 페이지를 쓰는데 너무 불편하고 좌우 페이지에 연결되는 큰 지도를 그리기가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내구성은 아주 쥐약이다.

그런 면에서 단단한 표지를 가진 몰스킨은 꽤 훌륭한 해결책으로 보였고, 덤으로 노트 자체에 고무줄이 붙어 있어서 따로 구질구질하게 예전처럼 노트를 고무줄로 매고다닐 필요가 없다. 내부의 속지가 완벽하게 수평으로 펼쳐진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더군다나 이런 살인적인 가격이라면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테니 소설을 위한 설정노트로 쓰기에 딱 좋을 것 같아서 선택했다. 나름대로 내 직업을 위한 투자인 셈이다.

나는 예전부터 자기 나름의 기록매체와 그 기준을 가진 사람을 신뢰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 자기나름의 기록매체의 기준이 꽤 엄격하다. 흔하게 주변에서 굴러다니는 것을 쓰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 기록들을 보존하는데 열의가 없다. 적어도 내 경험을 보면 그렇다.

그리고 나는 자신의 기록에 대한 집착이 없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지나간 자신의 역사와 기록에 대해서 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만이 지금 주어진 자신의 현실에 몰두하는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광고 전단지 구석이나 신용카드 고지서 봉투까지 메모지로 쓸 정도로 종이면 만사 오케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그 사람은 그 메모들을 날짜별로 분류해서 철해놓고 매년 연말에 정리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런 사람을 존경한다.

그 이유는 당장 나 부터가 기록에 집착하는 기간과 그 기록을 대책없이 유실하는 기간에 있어 인생의 질이 확연하기 틀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확고한 기록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절대로 믿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도 나의 이런 기준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당분간 더 나은 솔루션이 없다면 내 일상은 저 두껍고 무거운 플랭클린 플래너 한 권에 집중될 것이고, 내가 쓰는 모든 글들은 조만간 도착하게 될 몰스킨 노트북에 집중될 것이다. 분산보다는 통일화, 규격화를 좋아하지만 플래너에 소설관련 작업까지 일원화하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어쨋거나......................주문한 몰스킨 노트북이 도착할때까지 아주 목이 빠지겠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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