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밀어 올리며 아내와 손을 잡고 터벅터벅 투표소로 갔다. 중얼중얼 잡담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못내 무거웠다. 잠깐 사람들에게 농담처럼 말했지만 나는 그 순간까지도 이명박을 찍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잘난 척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부부가 날마다 밤새며 미친 듯이 일하면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최소한 밥을 굶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명박을 찍으려고 했다. 다카기 마사오(한국명; 박정희) 시절의 굴뚝과 곡괭이질을 그리워하며 향수에 젖은 이 땅의 많은 노예들과 성장촉진체를 링거로 맞으며 고도성장 드라이브라는 마약에 취한 많은 이들이 절망하고 고통에 신음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싶었다.

이 아름다운 땅의 허리를 잘라 대운하를 파고 골프장을 잔뜩 만들어 이 사랑스러운 나라를 난도질하는 광경을 진심으로 보고 싶었다.

그런다면 나는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땅을, 이 나라의 국민이기를 포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더이상 진한 녹색에 ROK라는 글자가 금박으로 찍힌 대한민국 여권을 쓰지 못해도 가슴 아프지 않을 것 같다.

도덕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성장 드라이브라는 마약만 투여해주면 마냥 기뻐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슬퍼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승자에게 올인하는 사회 풍토가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하는가? 그게 정말 이명박 같은 인물이 앞장서서 경제를 이끌어주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 났다고 믿는가?


투표용지를 받아 홀로 서자, 붉은 도장을 들고 꽉 막힌 공간에 홀로 남겨지자 그런 생각들이 스쳐갔다.




......................................결국 나는 이명박에게 투표하지 못했다.
결국 나란 인간의 한계를 그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친한 이들과 술자리에서 그런 말을 했었다. 꽤 음울하고 신랄한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

희망이라는 건 말이야.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을 취하게 만드는 가장 악랄한 마약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난 만약 내 인생에 희망이라는 놈이 나타난다면 그 자리에서 머리에 45구경을 박아줄꺼야.

....................................오늘 나는 결국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대신 투표를 마치고 아내의 손을 쥐고 동사무소를 나왔다. 아내가 내 곁에 있어서 다행이다.

집에 있으면 계속 뉴스만 볼 것 같아서 일을 하려고 텅 빈 회사로 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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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독도사랑 2007/12/19 16:17 | PERMALINK | EDIT | REPLY |

    저의 며칠 전 심정과 너무도 흡사 하군요. 저 역시 투표를 했습니다. 그러나 투표장에 가기 전 마음을 바꾸고 가서 도장을 누르는 데 1초도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나만 열심히 살면 되, 나와 뭔 상관.. 이렇게 볼수도 있지만 최소한 공약도 보고 차악이 아닌 차선의 길을 선택해 언론에서 떠드는 지지율과 대세를 따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소신투표는 아닐런지 모르지만 전략적 투표를 하고 말았습니다. 결과가 어찌 나오 던 후회는 없을 것입니다.

  2. 늑대호수 2007/12/19 17:22 | PERMALINK | EDIT |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전략적 투표가 타협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하나의 소신이라고 위안을 삼아 봅니다.

  3. 네이버소년 2007/12/19 16:43 | PERMALINK | EDIT | REPLY |

    소설을 쓰네

  4. 늑대호수 2007/12/19 17:22 | PERMALINK | EDIT |

    밥은 먹고 다니십니까? 훗~ ^_^*

  5. 나인테일 2007/12/19 17:20 | PERMALINK | EDIT | REPLY |

    저도 한국사람 하기 싫어요. 저기 위에 네이버소년 같은 친구들이랑 같은 공기 마시면서 살기도 싫어요.

  6. 늑대호수 2007/12/19 17:23 | PERMALINK | EDIT |

    다양성의 공존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 봅니다. 노예제도를 신봉하는 노예에게 자유민을 강요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이니까요.

  7. bystander 2007/12/19 18:01 | PERMALINK | EDIT | REPLY |

    마지막까지 갈등하다가 방금 투표하고 왔습니다. 우리의 표 하나하나에 담긴 뜻이 저들에게 전해지길.

  8. 늑대호수 2007/12/20 17:53 | PERMALINK | EDIT |

    너무 늦은 것 같습니다. ㅠ.ㅠ

  9. rockofages 2007/12/19 20:04 | PERMALINK | EDIT | REPLY |

    sad but true.
    그래도 아직 희망을 가슴에 품고서 문국현 후보를 찍고 왔습니다.
    지금보다는 다음을 위해서 말이죠...

  10. 늑대호수 2007/12/20 17:54 | PERMALINK | EDIT |

    좀 더 경력을 쌓고 좀 더 실천으로 보여준다면 보다 큰 지지를 얻을 수 있는 후보라고 생각합니다. ^^;

  11. 미로우 2007/12/19 23:52 | PERMALINK | EDIT | REPLY |

    희망이란게 참 사람 병신같고 허탈하게 만드는 유혹이죠 저도 5년전 노무현이 당선됬을때 지금의 님과 비슷하게 느꼈던거 같습니다 ㅍㅍ...

  12. 늑대호수 2007/12/20 17:55 | PERMALINK | EDIT |

    전 노무현때도 별로 기쁘진 않았습니다만 납득은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가슴으로도 머리로도 받아들이기 힘들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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